-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서인 이언강(李彦綱)·박태손(朴泰遜) 등으로부터 역적 허견(許堅)의 추종자라는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 당하고 문외 출송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승지로 복관 되어 이듬해 형조판서, 1691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여 흑산도에 안치되었다가, 1699년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701년 장희재(張希載)와 공모, 인현왕후(仁顯?后)를 해치려 하였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유명현(柳命賢)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인이 집권하면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事)로 남인이 실각되자 풀려났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을 시작으로 1696년 승지·병조·참지·예조참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으며 고사(古史)에도 밝았다. 좌찬성에 증직(贈職)되었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심권(沈權)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숙종 1년(1675) 사마시에 합격, 1678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세력이 축출당함에 따라 남해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695년에 풀려났다. 그러나 민비가 죽자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중궁으로 올리자고 상소를 올렸던 죄로 국모모해사건의 발각과 동시에 남인의 세력이 완전히 축출당할 때 다시 장흥에 원찬(遠竄)되었다. 그 뒤 여러 번 구제의 상소가 있은 뒤 1704년에 풀려났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목임일(睦林一)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효종 2년(165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涇)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남해 유배에서 풀려나 도승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이다. 문집에 『약천집(藥泉集) 』이 있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남구만(南九萬)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연려실기술 제34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기록에 의하면, 경신대출척으로 남해에 유배된 인물로는 조성(趙?) · 기상진(套尙震) · 김초삼(金楚三)이 있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김초삼(金楚三)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숙종 5년(1679) 예조참의를 거쳐 공조판서, 대사헌을 지내고 1686년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에 장숙의(張淡儀) 일가 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688년 방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진규(朴鎭圭), 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되었으며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김만중(金萬重)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연려실기술 제34권 숙종조 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기록에 의하면, 경신대출척으로 남해에 유배된 인물로는 조성(趙?) · 기상진(套尙震) · 김초삼(金楚三)이 있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기상진(套尙震)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1701년 예조좌랑을 지낸 뒤 잠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가 다시 해운판관(涇運判官)을 지냈다. 1707년 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시사를 논하다가 파직, 유배된 수찬 김세흠(金世欽)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으나 왕의 노여움을 사 남해로 귀양갔다. 1711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정언으로 복직되었다.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권두기(權斗紀,)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당대 남인의 중심적 인물로 처신하다가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중추부판사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당하고 영일(迎日)에 위리안치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풀려나 영의정에 등용되고, 같은 해 6월 유배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정국이 반전됨에 따라 관직이 삭탈되고 남해에 안치되었으나 이듬해 고령이라 하여 고향에 돌아가 1699년 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권대운(權?運)
- 남해유배문학관DB남해군청숙종 22년(1696) 7월 21일 방찬(方燦) 등이 장형(張炯)의 묘에 목인(木人)을 묻어 서인을 모해하려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동궁(東宮, 후일의 경종)에게 불리하다 여긴 채제윤(蔡悌胤)은 강오장(姜五章)과 윤종서(尹宗緖)에게 그 부당함을 상소하기를 권하였다. 소초는 윤종서가 짓고 강오장은 상소문을 썼다. 이 사건은 역적 방찬에 윤종서가 연루되어 있다 하여 의금부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숙종 22년(1696) 12월 16일 강오장은 남해에,kor2015-11-04T20:51:02+09:00시대(조선,고려):조선||시대:후기강오장(姜五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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